- 영화 제목: 황해
- 배급사: (주)쇼박스
요즘 OTT에만 들어가도 볼 영화가 넘쳐나는데 이상하게 가끔씩 예전 한국 영화들이 더 보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특히 거칠고 날 것 같은 범죄 영화들 말입니다. 그럴 때 떠오르는 제목 중 하나가 바로 나홍진 감독의 황해입니다.
추격자로 이미 장르 팬들을 사로잡은 나홍진 감독이 2번째로 내놓은 이 작품은 개봉 당시에도 “수위가 세다”, “에너지에 압도된다”라는 반응이 많았습니다. 저도 처음 봤을 때 솔직히 좀 무서웠습니다. 공포 영화의 귀신이 무서운 게 아니라 현실에서 충분히 마주칠 수 있을 것 같은 인간의 폭력성과 절망이 너무 생생하게 다가와서입니다.
1. 작품소개와 줄거리 - 황해, 바다 이름이자 경계의 이름
영화 제목 황해는 중국과 한국 사이에 실제로 존재하는 바다 이름이기도 하지만 영화 안에서는 하나의 상징처럼 쓰입니다.
물리적으로는 연변에서 한국으로 넘어가는 길이지만 그 너머에는 합법과 불법, 인간과 짐승, 희망과 절망이 모호하게 뒤섞여 있는 세계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러닝타임이 짧지 않은데도 체감상 “길다”는 생각이 별로 들지 않는 이유는 영화가 초반부를 제외하면 거의 쫓기고, 도망치고, 싸우는 흐름으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에너지가 강한 영화라고 보시면 됩니다. 줄거리를 살펴보면 주인공 김구남(하정우)은 연변에서 택시를 몰며 하루하루 버티는 조선족입니다.
하지만 “버틴다”라는 표현조차 과할 만큼 그의 삶은 이미 바닥을 치고 있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구남에게 “네 마누라는 한국 가서 딴 남자랑 잘 살고 있을 거다”라고 비아냥거립니다. 술 취한 빚쟁이들은 그의 집에까지 들이닥쳐 고기와 술을 먹어 치우고 구남은 그저 속으로 부글부글 끓을 뿐 제대로 반박도 못 합니다. 이미 자존감과 체력, 경제력까지 모두 소진된 상태라고 보면 됩니다. 이 답답한 연변 파트는 처음 보는 분들에겐 살짝 늘어진다고 느껴질 수 있지만 뒤에 이어질 지옥도에 설득력을 부여하는 중요한 준비 구간입니다. 구남이 왜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관객이 충분히 체감하게 만드는 구간이기도 합니다. 다음은 절망의 타이밍에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면가(김윤석)입니다.
면가는 연변에서 조선족들을 상대로 각종 브로커 일을 하는 인물인데 처음부터 퀴퀴하게 썩은 기운이 느껴지는 캐릭터에 가깝습니다. 그가 구남에게 건네는 제안은 단순했지만 잔인합니다. 구남은 결국 이렇게 살 바에야 한 번 승부를 걸어보자는 마음으로 제안을 받아들이고 불법 밀입국선에 몸을 싣고 한국으로 향합니다. 여기서부터 영화는 황해라는 물리적 경계를 넘어 완전히 다른 차원의 폭력 세계로 들어가게 됩니다. 서울에 도착한 구남은 면가에게서 받은 사진, 주소, 일정표를 들고 표적이 되는 인물을 미행합니다. 하지만 그는 전문 킬러가 아닌 아마추어 중에서도 가장 서툰 초심자에 가깝습니다.
긴 시간 끝에, 구남은 결국 목표를 찾아내고 충격적이면서도 어설픈 방법으로 살인을 저지릅니다. 이 장면은 연출 방식 자체도 강렬하지만 “한 번 선을 넘은 인간이 어떤 얼굴을 하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포인트라 보는 내내 손에 땀이 났습니다.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살인을 성공한 순간부터 구남은 오히려 더 큰 위기에 빠집니다. 그가 죽인 인물이 사실은 한국 조직 간의 복잡한 이권 싸움의 핵심 인물이었고 그의 죽음으로 판 전체가 요동치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구남이 살인을 저지른 직후 여러 세력이 동시에 움직입니다. 놀랍게도, 이 모든 타깃의 중심에는 김구남이 서게 됩니다.
구남은 한 사건의 가해자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여러 세력에게 꼭 필요하지만 없어져야 할 존재가 되어버립니다. 이후부터 영화는 말 그대로 모든 사람이 한 남자를 쫓는 거대한 추격전으로 변합니다. 이 과정에서 구남은 자신의 아내와 관련된 진실에 조금씩 다가가지만 그 진실이 그를 구해주는 방향으로 작용하진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더 깊은 함정으로 빠져들 뿐입니다.
2. 연출과 분위기 – 숨 쉴 틈을 허락하지 않는 나홍진 스타일
황해를 처음 보신다면 연변 파트에서 “조금 느린데?”라고 느끼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느림은 후반부를 위한 정교한 탄성이라고 보는 게 맞습니다. 연변에서 얼마나 답답하고 가난하게 사는지, 구남이 어떤 감정 상태로 한국에 오는지 충분히 보여줬기 때문에, 이후 그가 살인을 저지르고 본격적인 추격전에 들어갔을 때 감정적인 설득력이 살아납니다. 만약 초반부를 대충 훑고 넘어갔다면 후반부의 광기 어린 도주극은 그냥 “폭력적인 액션 쇼”로만 보였을 수도 있습니다. 나홍진 감독은 이 부분을 끝까지 버리지 않고 밀어붙입니다.
이 영화의 또 다른 특징은 카메라의 움직임입니다. 대부분의 장면에서 카메라는 인물들 코앞까지 다가가 있고 좁은 골목과 방 안을 따라 미친 듯이 흔들립니다. 흔들리는 카메라 덕분에 때로는 무엇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정확히 보이지 않을 때도 있지만 그만큼 현장에 같이 끌려 들어간 느낌이 강해집니다.
3. 총평 – 황해를 건너는 건 바다만이 아니다
마지막으로 전체적인 감상을 한 줄로 정리하자면, 황해는 ‘황해’라는 바다를 건너는 한 남자의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인간이 넘지 말아야 할 선을 하나씩 넘어가는 과정에 대한 영화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연변의 가난한 택시기사에서 한국의 지명 수배범이 되고 다시 연변과 한국의 여러 세력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기까지. 김구남의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우리가 그의 편을 들고 있는지 아니면 그를 비난하고 있는지조차 헷갈리게 됩니다. 그만큼 영화는 인물들을 흑백으로 가르지 않고 회색 지대에 오래 머무르게 합니다. 저에게 황해는 “재밌었다”보다 “쉽게 잊히지 않는다”라는 표현이 더 잘 어울리는 영화였습니다. 불편하고 무겁지만 가끔씩은 이런 영화가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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